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혁거세 거서간 (문단 편집) == 치세 == 기원전 69년 출생, 기원전 57년 즉위라는 건국 연도에 대해서는 현재 연구 중에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사로국]] 문서 참조. 혁거세 시대의 사로국은 [[한반도]]에서는 살만한 동네였던 모양으로 당시 한반도 남서부를 지배하던 [[마한]]이나 [[낙랑군]] 등이 공격했지만 방어했다. [[바다]] 건너 [[왜]]에서 왔다던 호공도 있다. 왜국에서 왔다는 대표적인 사람이 [[호공]]. 기원전 50년(즉위 8년), [[왜구]]들이 쳐들어온다. 그러나 혁거세의 인덕을 듣고서 싸우지 않고 되돌아갔다고 되어있다. 시조인 만큼 설화적으로 각색된 내용으로 보인다. 기원전 41년(즉위 17년), 초기 왕답게 [[전국]] 6부를 돌며 민정을 살폈고 [[농업]]과 [[누에]]치기를 장려한다. 그런데 당시는 전국이라고 해도 작아서 신라 [[영토]]는 경주 지역 정도였다. 한국 고대사에는 [[우산국]]처럼 [[4세기]]~[[5세기]]까지도 일개 [[도시]]가 나라를 칭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9년(즉위 19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변한]]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는데 [[백제]]가 [[온조왕]] 때 [[마한]]을 흡수했다는 기록과 더불어 믿기 힘든 초기 기록으로 꼽히고 있다. 변한은 이후 [[가야]]로 변화하는데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것은 수백년이나 뒤인 6세기다. 대체로 [[삼한]]이 이런저런 소국들을 정리하고 완전히 백제, 신라, 고구려의 [[삼국]]으로 대체된 것은 뒤의 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도 변한은 지금의 [[경상남도]] 일대에 거의 다 걸쳐져 있었다. 이런 큰 세력이 조그만 국가에 스스로 항복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설령 항복을 했더라도 그 자리에 멀쩡히 가야가 들어선 것 자체가 이상하다. 하지만 가야도 수많은 국가를 통칭해 가리키는 것이고 이후 [[포상팔국의 난]] 같은 예를 보면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당대 국가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삼국이 아닌 [[도시국가]] 규모의 수많은 국가들이 많이 있었다. 마한 54개, 진한 12개, 변한 12개라고 하는데 실상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워낙 소국들이 많고 여기저기 뒤섞여 있는 게 [[한사군]] 남부 한반도의 당대 현실이었다. 여기서 변한이라고 한 건 사로국 주변에 위치한 변한쪽 군소 세력을 병합한 것으로 해석하면 맞아 떨어진다.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행정구역)|수도]]에 [[금성]] 도성을 지었으며, 기원전 32년에 금성에 [[왕궁]] 건물을 지었다. 기원전 28년(즉위 30년), [[낙랑]]이 쳐들어왔지만 성 밖에 쌓여있는 노적가리를 보고 '이곳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의가 있는 나라'라는 평을 내리고 스스로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다. 앞서 왜인들이 변경에 쳐들어왔다가 혁거세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 버렸다는 기록과 비슷한 일화인데 일단 낙랑은 [[계림]]에서 매우 먼 곳이니 아는 것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기껏 굽이굽이 [[백두대간]]을 넘어 왔는데 성이 버티고 있으며 쌓인 노적가리를 보니 [[식량]]도 제법 축적되어 있다는 결론을 냈을 것이다. 그런 데다가 내부 단속도 잘되는 것 같으니 패배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공격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공성전에 들일 비용을 생각하면 이겨도 남는 장사라는 보장이 없고 못 이기면 돌아갈 길이 또 막막하니까 말이다. 기원전 26년(즉위 32년), [[마한]] 왕과 신라 [[호공]]의 말다툼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러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마한]] 왕: [[신라]]는 마한에 조공을 보내오던 국가인데 근년은 공물을 보내지 아니하니 이게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인가? > >호공: 우리나라는 두 성인([[박혁거세]]·[[알영부인]])이 [[신라|나라]]를 세운 후, 인재가 넘치고 천시가 고르며, 창고가 가득 찼고, 백성이 어지니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들까지 우리를 두려워하는데 우리 임금은 겸손하여 신하를 보내 이렇게 인사를 하니 이는 예에 지나친다고 할 수 없거늘, 도리어 대왕이 협박하시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에 마한 왕이 참하려 하자, 곁에 있던 신하들이 말려서 호공은 살아서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신라가 새로이 부상함과 더불어 삼한 전체의 수장 노릇을 하던 마한도 더 이상 신라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기원전 19년(즉위 39년), 마한 왕이 죽었다. 신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혁거세에게 마한 왕이 지난번에 우리 사신을 욕보였으니 지금 마한을 치자고 했지만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까지 했다고 한다. 기원전 5년(즉위 53년), [[동옥저]]에서 남쪽에서 성인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0필을 [[선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렇듯 60년 넘게 신라를 [[통치]]하다가 기원후 4년 73세로 승하했다고 한다. 1년 전이었던 기원후 3년 경주에 [[용]] 2마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죽을 때도 기이한 이야기가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8일 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 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혹은 뱀이 무덤을 지키기에 사릉이라고 한다. >----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61년 봄 3월에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셨다. 사릉(蛇陵)에 장사 지냈는데,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있다. >----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혁거세 거서간-'''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토막]]난 데다 그걸 수습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니, 위의 설화를 유추해 관련 학계에서 무수히 현실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너무 기이한 기록이라 정설은 없으며 [[반란군]]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요소들이 몇 개 있는데 자세한 것은 [[남해 차차웅]] 문서 참고. 한편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박혁거세의 농경 신화를 뜻한다고 한다. [[건국]]의 신화적 인물은 승천하거나 신으로 모시는 것이 보통인데 [[뱀]]이 이를 막고, 시체가 5조각이 나서 땅에 묻힌다. 신화적으로 시체가 묻히는 것, 무언가를 조각내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며 뱀은 신화적으로 [[남근]]을 상징해 다산과 생산 등을 상징한다. 시체가 다섯 토막인 것은 어머니가 얻은 [[오곡]]과 연관되는데 죽은 뒤에는 농경신으로 모셔졌지만 차마 건국 신화에 [[곡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넣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 <[[남해 차차웅]] 본기> 처음에서는 혁거세 [[사망]] 직후의 [[국상]] 기간을 노리고 [[낙랑]]이 또다시 쳐들어와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고 하는데 혁거세의 승하 기록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박혁거세와 얽힌 전설로 [[금척]] 이야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